
솔직히 처음엔 별 기대를 안 했습니다. "고등학교 첫사랑이 10년 뒤에 재회한다"는 설정, 한국 드라마에서 이미 숱하게 본 공식이니까요. 그런데 1회를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인터뷰 컷이 섞이는 순간, 이 드라마가 보통 로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전교 1등과 꼴등이 만든 드라마, 그 설정이 의미 있는 이유
〈그 해 우리는〉은 2021년 12월부터 2022년 1월까지 SBS에서 방영된 16부작 월화드라마입니다. 최우식이 연기한 최웅은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던 전교 꼴등 출신이고, 김다미가 연기한 국연수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악착같이 달려온 전교 1등입니다. 두 사람이 고등학교 홍보 다큐멘터리에서 억지로 짝을 이루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모큐멘터리(Mockumentary) 형식이었습니다. 모큐멘터리란 실제 다큐멘터리인 것처럼 허구의 이야기를 연출하는 방식으로, 인터뷰 컷과 핸드헬드 촬영을 혼합해 인물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기법입니다. 이 형식 덕분에 최웅과 국연수가 카메라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놓는 독백이 시청자에게 훨씬 가깝게 닿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실제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느낌이랄까요.
10년이 지난 뒤, 고등학교 시절 다큐 영상이 역주행(Reverse Trending) 콘텐츠가 되면서 두 사람이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됩니다. 역주행이란 과거에 발표된 콘텐츠가 뒤늦게 대중의 관심을 받아 인기가 급상승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장치 하나로 드라마는 "고등학교 시절의 우리"와 "1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를 자연스럽게 교차시킬 수 있게 됩니다. 타임라인을 오가는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 구조 덕분에 시청자는 두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왜 상처를 받았는지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비선형 서사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전개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거나 뒤섞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하는 서술 방식입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국연수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맥락입니다. 할머니 강자경의 손에서 자라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온 인물이라는 설정이, 단순히 "차갑고 독한 여자"로 읽히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런 캐릭터 설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드라마를 보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연수의 선택이 이해 안 된다고 느낄 법한 순간마다, 드라마는 조용히 그 이유를 과거 장면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드라마의 핵심 감정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고등학교 시절의 설렘과 어긋남: 다큐 촬영 과정에서 티격태격하다가 서로에게 빠져드는 과정
- 이별의 현실성: 성격 차이와 현실적 걱정, 각자의 상처가 쌓여 결국 연수가 웅을 떠나는 선택
- 10년 뒤 재회의 어색함: 남이 된 사이에서 다시 피어나는 미련과 감정의 온도 차
- 결말의 성장 서사: 각자의 자리에서 성숙해진 두 사람이 다시 선택하는 사랑
완성도는 높지만, 아쉬운 지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 해 우리는〉의 결말은 해피엔딩입니다. 웅이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연수에게 프로포즈하고, 두 사람이 결혼하며 새 다큐 카메라 앞에 "최웅, 국연수 부부입니다"라고 나란히 서는 장면으로 드라마가 끝납니다. 그 장면이 참 좋았습니다. 억지스럽지 않고, 두 사람이 각자의 꿈과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은 채 다시 만난다는 방향이 설득력 있었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갈등 해소가 좀 빠르다는 느낌이 든 겁니다. 초반부의 날 선 현실감, 연수가 가난과 성공 사이에서 흔들리는 복잡한 내면이 중반까지는 충분히 살아 있었는데, 결말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그 긴장감이 다소 부드럽게 봉합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현실에서라면 유학과 장거리 연애, 커리어와 결혼의 선택이 훨씬 복잡한 갈등을 만들었을 텐데, 드라마는 그 부분을 감성적인 연출로 자연스럽게 넘어갑니다.
서브 캐릭터 활용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김지웅(김성철)은 두 사람의 고교 시절 다큐를 찍은 감독으로, 관찰자 시점에서 오는 고독함과 짝사랑이라는 서사 잠재력이 컸던 인물입니다. 엔제이(노정의) 역시 완벽한 스타의 껍질 안에 숨은 외로움이 흥미로웠고요. 그런데 두 인물 모두 결국 주인공 커플의 러브라인을 보조하는 역할 안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조연 활용의 아쉬움은 16부작이라는 분량에서 나오는 한계인 경우가 많은데, 이 드라마도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OST의 완성도는 따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OST를 들으면서 그 감정의 잔향을 붙들고 있었으니까요. 방송 콘텐츠 산업에서 OST(Original Soundtrack)란 드라마나 영화를 위해 제작된 음악으로, 장면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시청자가 작품을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입니다. 〈그 해 우리는〉은 이 부분에서 특히 강했습니다.
드라마의 시청률과 화제성은 수치로도 확인이 됩니다. OTT 플랫폼 확산 이후 드라마 소비 방식이 변화했다는 분석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도 꾸준히 다루고 있으며, 〈그 해 우리는〉 역시 방영 당시 넷플릭스 동시 공개로 국내외에서 동시에 화제를 모은 사례입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또한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 콘텐츠 가치 정보 분석 시스템(RACOI)에 따르면 이 작품은 방영 당시 화제성 지수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기록했습니다(출처: 방송통신위원회).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이 작품이 머릿속에 남았던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단순히 설레는 첫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의 상처를 안고 성장한 두 사람이 다시 선택하는 사랑"이라는 구조가 지금 시대의 감각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첫사랑을 미화하는 대신, 그 시절의 불안과 열등감까지 솔직하게 보여줬다는 점이 이 드라마를 다른 로코와 구분짓는 지점입니다.
현실적인 이별과 재회 서사를 좋아하거나, 인물 심리 묘사가 섬세한 드라마를 찾고 있다면 충분히 볼 만한 작품입니다. 다만 후반부의 갈등 해소 속도가 다소 빠르다는 점은 미리 감안하고 보시길 권합니다. 감성과 현실감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으려 한 드라마인데, 그 균형이 완전히 맞춰진 건 아니었지만, 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기억에 남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그 해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