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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고 (소원 앱, 하이틴 호러, 저주 구조)

by 드라마틱5 2026. 4. 27.

드라마 기리고

넷플릭스를 켜 놓고 멍하니 썸네일만 훑다가 습관적으로 재생 버튼을 누른 적,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기리고〉를 시작했습니다. "소원을 이뤄주는 앱"이라는 설정이 어딘가 낯익다 싶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그 익숙함이 오히려 이 드라마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장치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2026년 4월 24일 전 세계 동시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8부작 시리즈, 그 첫인상과 후반부까지의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소원을 이뤄주는 앱, 설정이 익숙한데 왜 불편했나

솔직히 처음에는 큰 기대 없이 틀었습니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지만 대가가 따른다"는 공식은 이미 수십 편의 호러물이 써먹은 구조입니다. 〈기리고〉도 같은 길을 걷겠구나 했는데, 1화 중반쯤부터 그 예상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드라마가 다른 점은 공포의 방향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앱이 무섭다기보다, 앱을 사용하는 고등학생들의 표정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말로는 "그냥 장난이지"라고 하면서도 눈빛은 진짜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그 양가감정이 화면에서 너무 사실적으로 전달됐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첫 번째 소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무서움보다 먼저 든 감정은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YA 호러(Young Adult Horror)라는 장르 특성상, 이 드라마는 단순히 피와 귀신으로 공포를 만들지 않습니다. YA 호러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독자·시청자를 주 타깃으로 삼아, 성장통·또래 관계·정체성 혼란을 공포의 소재로 활용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기리고〉는 이 공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동시에 스마트폰 세대의 욕망과 SNS 시선 강박을 "소원 앱"이라는 현대적 매개체로 압축해 넣었습니다.

핵심 설정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앱에 영상을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 저주는 앱을 삭제한다고 끊어지지 않는다
  • 앱의 기원은 특정 인물의 원한과 복수심에서 비롯되었다

이 구조 자체는 단순한 것 같지만, 운영 방식이 다릅니다. 저주의 대가가 소원을 빈 당사자에게만 돌아오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죄책감과 의심이라는 형태로 번져나가는 설계입니다. 단순한 저주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캐릭터들이 납득되는가, 아니면 기능적으로 소모되는가

〈기리고〉를 두고 "캐릭터가 살아있다"는 반응과 "후반으로 갈수록 메시지 전달용 도구가 된다"는 반응이 동시에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양쪽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앱을 처음 발견해 친구들에게 퍼뜨린 형욱은 초반부터 가장 많은 죄책감을 짊어지는 인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시작한 장난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는 과정에서, 그의 표정 변화만 따라가도 1화에서 중반까지의 심리 변화가 상당히 촘촘하게 쌓입니다. 제 경험상 이 캐릭터가 가장 인간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반면 앱의 규칙과 패턴을 분석하는 하준은 서사가 진행될수록 플롯 드라이버(plot driver), 즉 이야기를 앞으로 밀어내는 기능적 역할에 집중되면서 내면의 결이 얇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플롯 드라이버란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특정 행동이나 발견을 담당하는 캐릭터 포지션으로, 탐정형 인물이 이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준이 기리고의 기원을 추적하고 과거 희생자와 연결된 인물을 찾아가는 과정은 미스터리 파트를 견인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드러납니다.

나리는 가장 논쟁적인 캐릭터입니다. 저주를 부정하고 합리화하려는 인물이 중반 이후 "누가 누구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가 밝혀지면서 갈등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구조인데, 일부 시청자들은 이 변화를 납득하고 일부는 작위적으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리의 감정 폭발 자체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 폭발의 속도가 조금 더 점진적으로 쌓였다면 더 강하게 남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세아는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과 저주를 끊으려는 역할을 동시에 맡으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가장 극단적인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전소영의 연기가 이 무게를 상당 부분 받쳐주고 있다는 점은 많은 리뷰가 공통으로 짚는 부분입니다.

저주 구조가 말하려는 것, 그리고 분산된 메시지

〈기리고〉의 저주 구조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바로 오컬트 미러링(occult mirroring)입니다. 오컬트 미러링이란 초자연적 현상이 현실의 사회적 문제나 심리적 억압을 거울처럼 반사하며 공포를 증폭시키는 서사 기법으로, K-호러 장르에서 자주 활용됩니다. 〈기리고〉는 이 기법을 통해 교내 왕따, 가족의 기대, 계급 감각, SNS 시선 강박을 앱이라는 장치로 한꺼번에 비춥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제가 직접 8화를 다 봤는데, 각 에피소드 단위로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8화를 다 보고 나서 "이 드라마가 결국 가장 강하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냐"를 떠올리려 하면, 순간 머릿속이 흐릿해집니다.

K-드라마 연구자들이나 평론 쪽에서는 이를 두고 다층적 주제의식이 오히려 단일한 공명을 약화시킨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실제로 넷플릭스가 공개한 공식 소개문에서도 "욕망, 죄책감, 우정, 배신"이 동시에 언급되는데, 이 키워드들이 한 작품 안에서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어야 진짜 무게감이 생깁니다(출처: Netflix 공식 사이트).

"소원의 대가"라는 주제가 강하게 밀어붙여지는 장면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학원 드라마 특유의 로맨스 라인이 끼어드는 순간, 그 긴장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느낌이 반복됐습니다. 이게 YA 호러 장르의 숙명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가 더 치밀하게 엮였다면, 우정과 욕망이 공포의 연료가 되는 구조가 더 설득력 있게 완성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 플랫폼에서 한국 호러·스릴러 장르의 소비량은 2023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10대 후반~20대 초반 시청층의 비율이 높은 편입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기리고〉가 넷플릭스의 첫 한국 YA 호러 시리즈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도 자체가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결말 톤과 이 드라마가 남기는 것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은 많은 분들이 이미 예상하고 계실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실제로 보고 나서 느낀 불편함은 예상보다 조금 더 복잡한 방향에서 왔습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없는 게 불편한 게 아니라, 남겨진 인물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것들이 구체적으로 보여서 불편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서사를 통해 쌓인 감정적 긴장이 해소되며 일종의 정화 감각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그 해소감을 주지 않습니다. "살아남았다"는 것과 "괜찮다"는 것이 전혀 다른 이야기임을 엔딩이 조용하게 증명합니다.

열린 결말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시즌2 가능성을 언급하는 시각도 있고, 저주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속편 없이도 이 엔딩이 충분히 완결성을 갖는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 쪽에 가깝습니다. 기리고라는 욕망의 시스템이 남아있다는 암시 자체가, 이 드라마가 하고 싶었던 말의 마지막 한 줄이라고 느꼈습니다.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내가 빌었던 소원들은 정말 아무도 다치지 않는 소원이었나"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단순한 공포물이라면 그냥 무서웠다가 끝났을 텐데, 이 드라마는 그 불편한 질문을 오래 남깁니다.

〈기리고〉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공포 장면보다 인물들의 눈빛과 선택에 집중하며 보시길 권합니다. 무섭다기보다는 불편할 작품이고, 그 불편함이 꽤 오래 간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가장 정직한 장점입니다.


참고: 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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