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변에서 더 글로리를 추천하는 목소리가 워낙 많아서 결국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저는 평소 학교폭력을 다룬 콘텐츠를 일부러 피하는 편인데, 이 작품만큼은 "한 번은 꼭 봐야 한다"는 말이 계속 들려왔거든요. 첫 회를 보고 난 뒤 느낀 건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피해자의 시간이 얼마나 오래 멈춰 있는지 정면으로 보여주는 드라마라는 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복수물은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장르로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더 글로리는 시청 내내 씁쓸함과 무거움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시선, 생각보다 냉정했다
더 글로리가 다른 학교폭력 드라마와 다른 점은 감정에 호소하기보다 냉정하게 구조를 해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은 고등학교 시절 박연진(임지연) 일당에게 끔찍한 폭력을 당하고 자퇴까지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교사·경찰·심지어 친모까지 모두 방관자로 그려집니다. 여기서 방관이란 단순히 '못 본 척'이 아니라, 피해자를 구조적으로 고립시키는 사회적 공범 행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 주변 어른들이 아무도 개입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가해 행위가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드라마가 아니라 뉴스에서 수없이 봤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더 글로리는 2006년 청주 중학생 집단폭행 사건에서 일부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위키백과). 동은이 교무실에서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데도 담임이 "네가 먼저 건드린 거 아니냐"라고 되묻는 장면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전형적인 2차 가해(Secondary Victimization) 구조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2차 가해란 피해자가 폭력을 신고했을 때 오히려 "네가 문제를 키웠다"는 식으로 비난받는 상황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학교폭력 드라마는 가해자의 처벌에 초점을 맞추는데, 더 글로리는 그보다 "왜 피해자는 평생 그날에 갇혀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집니다. 동은의 대사 중 "피해자들의 원점"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김은숙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 대사가 작품의 핵심 주제라고 직접 밝힌 바 있습니다(출처: 뉴스토마토). 제 경험상 이 부분이 가장 무겁게 다가왔는데, 폭력 사건 이후 세월이 흘러도 피해자는 여전히 그날의 상처 속에 살고 있다는 메시지가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복수의 방식, 통쾌함보다 씁쓸함이 먼저였다
더 글로리의 복수 구조는 매우 치밀합니다. 동은은 성인이 된 뒤 가해자 박연진의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담임교사가 되어, 연진과 그 주변 인물들의 약점을 하나씩 파고듭니다. 이 과정에서 의사 주여정(이도현), 가정폭력 피해자 강현남(염혜란) 등이 동은 편에 서면서 복수는 개인의 원한을 넘어 사회적 관계망 전체를 흔드는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복수가 주는 카타르시스보다 씁쓸함을 더 많이 느꼈습니다. 일반적으로 복수극은 "악당이 벌을 받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더 글로리를 보니 복수 자체가 또 다른 상처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이 너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동은이 연진에게 "나는 네 지옥이 될 거야"라고 선언하는 장면은,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어야 했던 피해자의 비극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가해자들의 최후입니다. 박연진은 기상 캐스터로 성공한 삶을 살다가 과거가 드러나며 무너지고, 전재준(박성훈)은 재력과 폭력성을 앞세우다 결국 파멸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결말이 지나치게 장르적인 우연과 극단적 상황에 의존하면서, 현실에서 실제 피해자들이 겪는 법적·사회적 한계는 상대적으로 옅게 그려진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시청하는 순간에는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화면을 끄고 나면 "현실에서도 이런 결말이 가능할까"라는 회의감이 남았습니다.
여성 연대와 피해자의 존엄,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제가 더 글로리에서 가장 좋았던 지점은 문동은과 강현남, 주여정으로 이어지는 피해자·피해자 가족·조력자의 관계였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서로를 도구로만 쓰지 않고 끝내 상대방의 존엄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연결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강현남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피해자로, 딸을 지키기 위해 동은과 손을 잡습니다. 동은이 과거의 자신을 위해 싸운다면, 현남은 현재의 딸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연대가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김은숙 작가는 인터뷰에서 "남성 구원자 없이도 여성 피해자들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여성 연대를 그리고 싶었다"라고 밝혔는데, 이는 기존 로맨스 중심 드라마에서 벗어나 쌍방 구원 서사를 보여주려는 의도였습니다(출처: 씨네21).
특히 동은이 현남에게 "당신의 봄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복수 이후의 삶이 단순한 복수로만 채워질 수 없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졌습니다. 작가가 말한 "The Glory"라는 제목의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빼앗겼던 존엄과 일상을 다시 되찾기를 응원하는 마음, 그리고 "동은이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는 지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주여정이라는 캐릭터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외과의사로 밝고 다정한 겉모습 뒤에 자신만의 상처와 복수의 이유를 숨기고 있는 인물인데, 동은의 과거를 듣고 그녀의 복수 계획에 깊이 관여하는 조력자이자 동반자가 됩니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려져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에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일부 가해자들의 최후와 사건 해결 방식이 너무 장르적인 우연과 극단적 상황에 의존하면서, 현실에서 실제 피해자들이 겪는 법적·사회적 한계는 상대적으로 옅게 그려진 느낌이 있었습니다.
또한 조연 캐릭터들 가운데 몇몇은 이야기의 메시지를 위해 철저하게 '악' 혹은 '선'으로만 소비되는 면이 있어, 인간의 복잡성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이사라(김히어라)는 재벌가 출신 화가이자 마약 중독자로 그려지는데, 캐릭터의 깊이보다는 '타락한 부자'라는 상징으로만 기능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동은의 감정선도 후반부로 갈수록 빠르게 정리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상처의 깊이에 비해 너무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아 아쉬웠고, 복수 이후 동은이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충분히 담기지 않은 듯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글로리는 분명 제게 오래 남을 드라마입니다. 폭력의 잔혹함 자체보다, 그 폭력을 외면하는 사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이 학교폭력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보진 않지만, 적어도 시청자에게 "누구나 가해자·방관자가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은숙 작가가 딸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는데, "엄마는 내가 죽도록 맞고 오는 게 좋겠어, 아니면 죽도록 때리고 오는 게 좋겠어?"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드라마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비슷한 사건 뉴스를 볼 때, 저는 아마도 이 드라마의 장면들을 함께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더 글로리는 '재미있었다'기보다 '한 번쯤은 반드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며, 시간이 지나도 폭력은 절대 사소하지 않고, 피해자의 시간은 멈춰 있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할 것입니다.
참고: 더 글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