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재생 버튼을 바로 누르지 못했습니다. '무가치함'이라는 단어가 화면에 떡하니 박혀 있는데, 어쩐지 그게 저를 향한 말 같았기 때문입니다. 박해영 작가와 차영훈 감독 조합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참 더 미뤘을 겁니다. 결국 틀었고,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열등감을 화면 밖으로 끌어낸 캐릭터, 황동만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황동만(구교환)이 있습니다. 20년째 영화감독 데뷔를 못 한 인물로, 대학 영화동아리 '8인회' 멤버 중 유일하게 제자리에 멈춰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 몇 장면에서 저는 솔직히 동만이 불편했습니다. 친구들 잘나가는 꼴을 못 봐서 삐딱한 말을 쏟아내고, 자기 연민과 분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유치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에피소드가 쌓이면서 그 유치함이 낯설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제가 속으로만 삼켰던 비교와 질투들이 동만의 입을 빌려 튀어나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파고드는 감정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비교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과 맞닿아 있습니다. 사회비교이론이란 사람이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할 때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판단하는 심리적 경향을 뜻합니다. 동만이 8인회 멤버들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무너지는 과정은 이 이론을 드라마 언어로 풀어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만이 산에 올라가 자기 이름을 있는 힘껏 부르는 장면, "앞으로 난 어마어마해질 거다"라며 잘나가는 영화사 대표 최동현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은 그 어떤 설명보다 직관적입니다. 저도 화면을 보면서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유가 뭔지" 생각하다가, 결국 그 밑바닥에는 존재 자체를 인정받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자기혐오가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 변은아
변은아(고윤정)는 동만과는 결이 다른 방식으로 무가치함과 싸웁니다. 영화사 '최필름'의 기획 PD로 겉보기엔 유능하고 프로페셔널하지만, 내면 어딘가에는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항상 켜져 있는 인물입니다.
제가 이 캐릭터를 볼 때 느꼈던 불편함은 동만과 달리 조용한 종류였습니다. 은아가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코피를 흘리는 장면, 관계가 틀어질 때마다 상대 탓도 자기 탓도 하면서 혼자 끙끙 앓는 모습이, 저도 회사에서 붙잡고 있던 표정과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인물 묘사가 드라마에서 이렇게 정밀하게 그려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은아가 보여주는 감정 패턴은 심리학 개념인 불안 애착(Anxious Attachment)과 연결됩니다. 불안 애착이란 어린 시절 불안정한 관계 경험으로 인해 성인이 된 뒤에도 타인에게 버려질까 두려워 과도하게 눈치를 보거나 자책하는 감정 패턴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현재의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은아의 모습이 딱 이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이 두 캐릭터, 동만과 은아가 나란히 있을 때 드라마는 가장 선명해집니다. 표현 방식은 정반대지만 두 사람이 싸우는 감정의 정체는 결국 같다는 것,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싶었던 핵심이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정 워치, 이 장치가 좋으면서도 아쉬운 이유
이 드라마를 다른 심리극과 구별짓는 장치 중 하나가 바로 '감정 워치'입니다. 동만과 은아가 감정 실험에 참여하면서 두 사람의 현재 감정 상태가 수치와 텍스트로 실시간 표시되는 장치입니다.
워치에 '알 수 없음'이라는 상태가 뜰 때 동만이 "이건 도와줘라는 감정이에요"라고 정의하는 장면은 제가 본 이 드라마 최고의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가, 드라마 전체 주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장치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감정 워치는 내러티브 장치(Narrative Device), 즉 이야기 안에서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도구로서 흥미롭지만, 동시에 배우의 표정과 상황만으로 느껴져야 할 감정을 수치와 텍스트로 설명해버린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관객이 스스로 해석할 여지를 좁히는 효과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존중하자는 드라마가 감정을 너무 친절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건 다소 역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런 시각도 있고 저런 시각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감정 워치가 없었다면 이 드라마가 더 깊이 들어올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두 번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치 덕분에 처음 드라마를 접하는 분들이 감정의 흐름을 따라오기 훨씬 수월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드라마를 어떤 상태에서 봐야 하는가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주변 몇 분께 추천을 했는데, 반응이 갈렸습니다. 어떤 분은 "내 얘기 같아서 좀 무너졌지만 보길 잘했다"고 했고, 어떤 분은 "너무 불편해서 중간에 껐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가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주는 작품이라기보다 직면하게 만드는 작품에 가깝다고 봅니다. 카타르시스란 억눌린 감정이 예술적 경험을 통해 해소되면서 얻는 정서적 정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드라마는 그 해소 대신, 평소 억눌러 뒀던 감정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관객에게 다시 맡겨버립니다.
이 드라마가 다루는 주제와 비슷한 사회적 맥락에서, 국내 성인의 자존감 관련 심리 지표는 꾸준히 주목받아 왔습니다. 한국 성인의 우울 및 불안 수준은 OECD 국가 평균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보고되고 있으며(출처: 보건복지부), 특히 또래 집단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주요 스트레스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출처: 한국건강증진개발원). 동만과 8인회의 관계가 단순한 드라마 설정이 아니라 현실의 풍경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이 편해지길 기대한다면, 그 기대는 접어두는 게 좋습니다. 대신 자기 안에 쌓아둔 감정들을 한 번쯤 꺼내볼 준비가 됐다면, 이 드라마는 꽤 정직한 거울이 돼줄 겁니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마음이 시원해지기보다는 눅눅해진 채로 크레딧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눅눅함 덕분에 저는 평소 피하고 있던 감정들을 조금씩 인정하게 됐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삶이 근사하게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안에 있는 무가치함을 무조건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게 됐습니다. 지금 자기 감정을 끝까지 들여다볼 준비가 된 분에게만 조심스럽게, 그리고 진심으로 권합니다. JTBC와 넷플릭스에서 동시 시청 가능합니다.
참고: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