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에서 뭐 볼지 고르다가 "야한 시대극"이라는 말만 듣고 반쯤 흘려들었던 드라마가 있다면, 브리저튼이 바로 그 케이스일 겁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즌1 첫 화를 틀었더니, 생각보다 훨씬 정통 로맨스 공식을 정교하게 쌓아 올린 작품이었습니다. 세 시즌을 다 본 지금, 어느 시즌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어디서 실망할 수 있는지를 솔직하게 정리해 드립니다.
시즌별로 로맨스 공식이 다르다는 것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리젠시 시대(Regency Era)를 배경으로 합니다. 리젠시 시대란 조지 3세의 재위 말기인 1811년부터 1820년 사이, 섭정 왕세자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 런던 상류층의 사교계는 철저한 신분 질서와 결혼 시장 구조로 유지되었습니다. 브리저튼은 바로 이 사교계를 배경으로 매 시즌 다른 커플의 로맨스를 다룹니다.
시즌1의 핵심 서사는 계약 연애(contract courtship)입니다. 계약 연애란 감정이 아닌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연인 관계를 연기하는 설정으로, 장르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클리셰 중 하나입니다. 다프네 브리저튼과 헤이스팅스 공작 사이먼은 각자의 필요 때문에 이 계약을 맺지만, 결국 감정이 앞서면서 서사가 굴러갑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이미 익힌 공식임에도 불구하고 리젠시 특유의 미장센(mise-en-scène)이 겹치니 설득력이 생겼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의상·세트·조명·인물 동선 등 시각적 요소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브리저튼은 이 부분에 상당히 공을 들인 작품입니다.
다만 시즌1 중후반부에서 갈등이 침실 문제와 아이 문제를 중심으로 반복되면서 감정선이 지지부진해지는 구간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앞부분이 워낙 잘 굴러가다 보니 후반의 속도 저하가 더 두드러졌고, 저는 결국 후반 에피소드 몇 개를 1.5배속으로 돌렸습니다.
시즌2는 개인적으로 세 시즌 중 가장 재미있게 본 시즌입니다. 앤소니와 케이트의 혐관 로맨스(enemies-to-lovers)가 중심인데, 혐관 로맨스란 처음엔 서로를 싫어하거나 대립하던 두 인물이 점점 끌리게 되는 서사 구조입니다. 이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케미의 밀도인데, 시즌2는 눈맞춤과 신체적 거리감만으로 긴장을 끌고 가는 방식이 시즌1보다 절제되어 있고, 그게 오히려 더 먹혔습니다. 제 취향에는 이쪽이 훨씬 잘 맞았습니다.
시즌별 서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시즌1: 계약 연애 → 진짜 사랑 / 아버지 트라우마 치유 / 리젠시 사교계 결혼 시장
- 시즌2: 혐관·금지 로맨스 / 의무 vs. 사랑 / 삼각관계(에드위나)
- 시즌3: 친구에서 연인 / 비밀 정체(레이디 휘슬다운) 공개 / 자아실현과 사랑의 공존
잘 만든 장르물이라는 것, 그 한계까지
브리저튼을 보면서 가장 인상에 남은 건 이 드라마가 장르적 자의식(genre self-awareness)이 뚜렷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장르적 자의식이란 작품 자신이 어떤 장르의 공식을 쓰고 있는지 인지하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브리저튼은 계약 연애든 혐관 로맨스든 친구에서 연인이든, 이미 수없이 반복된 공식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공식 안에서 의상과 케미와 서사 리듬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집중합니다.
그 덕분에 "새롭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되는" 드라마가 되었는데, 이건 칭찬이자 동시에 한계이기도 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브리저튼은 보는 동안엔 분명 재미있는데, 다 보고 나면 오래 남는 질문이나 여운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무거운 소재를 꺼내면서도 클라이맥스 이후 정리 과정이 늘 서둘러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즌3는 레이디 휘슬다운 정체 공개, 엘로이즈와의 갈등, 콜린과의 로맨스를 한 시즌 안에 다 처리하려다 보니 일부 갈등이 완전히 소화되기 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건 두 시즌으로 나눴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또 하나 짚고 싶은 건 컬러블라인드 캐스팅(color-blind casting)의 활용 방식입니다. 컬러블라인드 캐스팅이란 특정 인종 전통의 역할에 다른 인종 배우를 배치하는 캐스팅 방식으로,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인종의 배우를 적극적으로 기용합니다. 문제는 이 설정이 시각적 다양성은 제공하지만, 구조적 차별이나 인종적 정치성을 서사 안에서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갈등이 개인의 트라우마나 오해로 환원되고, 결국 사랑으로 봉합됩니다. 겉으로는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꽤 보수적인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그럼에도 시즌2의 앤소니와 케이트가 결국 서로의 짐을 내려놓는 장면, 시즌3의 페넬로페가 글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방향을 조정해 계속 써 나가기로 결심하는 엔딩은 제가 직접 보면서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이 두 장면은 각 시즌의 테마를 꽤 깔끔하게 마무리해 줍니다.
영국 문화학자 레이첼 갬블의 리젠시 로맨스 연구에 따르면, 이 장르는 계급과 결혼 제도라는 구조적 억압을 낭만화하는 동시에, 여성 주체성의 제한된 형태를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Open Library of Humanities). 브리저튼을 보면서 이 분석이 떠올랐는데, 이 드라마 역시 그 틀 안에서 움직이면서 동시에 그 틀을 조금씩 건드리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넷플릭스 공식 정보에 따르면 브리저튼 시즌1은 공개 첫 달에 8200만 가구 이상이 시청하며 당시 넷플릭스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출처: Netflix). 이 숫자는 단순히 흥행을 넘어, 로맨스 장르가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얼마나 강력한 소비 동력을 갖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브리저튼은 서사 완성도의 기복이 분명히 있는 드라마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시즌부터 시작할지 고민 중이라면, 혐관 로맨스를 좋아하는 분께는 시즌2를 먼저 권합니다. 계약 연애 클리셰가 좋다면 시즌1부터, 장기 떡밥의 회수를 기대한다면 시즌3까지 보는 게 맞습니다. 어느 시즌이든 "화려한 그림과 로맨스 공식에 취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꽤 영리하게 설계된 콘텐츠입니다. 새 시즌이 뜰 때마다 또 재생 버튼을 누르게 된다는 사실이, 이 드라마에 대한 저의 최종 평가이기도 합니다.
참고: 드라마 브리저튼 (Netflix, 시즌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