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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처음이라 (계약결혼, 현실로맨스, 하우스푸어)

by 드라마틱5 2026. 5. 12.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대출 상환 일정을 먼저 따지는 사람, 이상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보고 나서, 그게 사실은 꽤 현실적인 감각이라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2017년에 방영된 tvN 월화드라마로, 집 없는 보조작가와 집은 있지만 2048년까지 대출을 갚아야 하는 하우스푸어가 계약 결혼을 선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계약결혼이 로맨틱해 보이지 않았던 이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계약 결혼이라고 하면 보통 드라마에서 '설레는 장치'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그 설정을 꽤 건조하게 가져옵니다. 남세희(이민기)와 윤지호(정소민)가 계약서를 꺼내 드는 장면은 낭만적이기보다는, 월세 분담과 가사 노동 비율을 협상하는 사무적인 자리에 가깝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처음 멈칫했던 건, "이거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구나"라는 감각이 왔기 때문입니다. 드라마가 전면에 내세우는 건 하우스푸어라는 개념입니다. 하우스푸어란 집을 소유하고 있지만 무리한 대출로 인해 실질적인 생활 여유가 거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남세희가 바로 그 케이스인데, 집은 있고 직장도 있지만 매달 나가는 대출 원리금 탓에 생활 자체가 팍팍한 사람입니다. 2024년 기준 국내 가계부채 규모가 1,900조 원을 넘어섰다는 점을 감안하면(출처: 한국은행), 이 설정이 그냥 드라마적 과장이 아니라는 게 더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반대편에 윤지호가 있습니다. 그는 홈리스에 가까운 30대 여성입니다. 여기서 홈리스란 단순히 거처가 없다는 의미를 넘어, 보증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경제적 취약 상태를 뜻합니다. 드라마는 이 두 사람의 결핍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꽤 냉정하게 포착합니다. 사랑이 있어서 함께 사는 게 아니라, 조건이 맞아서 같이 버티기로 한 선택. 이 출발점 때문에 드라마 전체에 다른 온도가 깔립니다.

이 드라마에서 제가 가장 공감했던 장면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두 사람이 동성인 줄 알고 계약을 맺었다가 뒤늦게 이성이었다는 걸 알고 당황하는 초반부
  • 계약서에 침실 출입 금지, 가사 분담 비율, 손님 초대 제한 등을 빼곡히 적는 장면
  • 세희가 감정이 개입되기 시작하자 오히려 계약 조항을 더 꺼내드는 장면

이 장면들이 코믹하게 그려지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건, 두 사람이 감정보다 조건을 앞세워야 했던 각자의 사정이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 로맨스가 건드린 것들, 그리고 피해간 것들

중반부터 이 드라마는 세 커플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펼칩니다. 세희·지호 커플 외에도, 비혼주의와 자유 연애를 지향하는 우수지(이솜)와 상구(박병은), 결혼을 목표로 하지만 현실 앞에서 흔들리는 호랑(김가은)과 원석(김민석)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 구조를 서사 구성에서는 다층 서사(multi-strand narrative)라고 부릅니다. 다층 서사란 하나의 주제를 서로 다른 캐릭터의 시선으로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으로, 단일한 결론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구조 덕분에 드라마는 "결혼이 답이냐 비혼이 답이냐"가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어떤 선택이 자기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꽤 좋았다고 느낀 건, 세 커플 중 어느 쪽도 완전한 모범 답안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수지와 상구도, 호랑과 원석도,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삐걱대면서 나아갑니다. 그 삐걱거림이 사실적입니다.

다만 솔직히 비판하고 싶은 지점도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전반부에서 꺼내 든 가부장제, 시댁 문제, 명절 노동 같은 구조적 문제들이 후반부에서 충분히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다는 인상이 남습니다. 가부장제란 성별 위계를 기반으로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가 가족과 사회 전반에 작동하는 체제를 뜻합니다. 드라마는 이 체제를 비판하는 듯하다가, 갈등이 봉합되는 시점에서 '좋은 사람들끼리 대화하면 해결된다'는 쪽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조는 그대로인데 개인들이 착해지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세희의 캐릭터 처리도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는 감정 억압과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로 인한 감정 노동의 부담이 대부분 지호에게 집중됩니다. 감정 노동이란 자신의 실제 감정을 억누르고 상대방이 기대하는 감정 상태를 수행해야 하는 심리적 비용을 말합니다. 지호가 세희의 감정 표현 부재를 이해하고 기다리고 조율하는 장면들이 많은 반면, 그 과정에서 지호가 감당하는 피로와 희생은 드라마 안에서 충분히 문제화되지 않습니다. 이 불균형이 끝까지 해소되지 않은 채 해피엔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저는 이 드라마가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살짝 비추되 결국 로맨스의 온기 쪽으로 기우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 드라마가 남긴 것

후반부에 세희와 지호는 결국 이혼을 선택합니다. 계약서로 유지하던 관계를 한 번 무너뜨리는 것인데, 제가 이 장면에서 느낀 건 의외로 안도감이었습니다. 계약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서로를 계속 다치게 하는 것보다, 한 번 다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마주 서는 게 낫다는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엔딩에서 둘이 다시 서로를 선택할 때, 드라마는 이번에는 집주인과 세입자, 계약자와 피계약자가 아닌 남세희와 윤지호 개인으로서 마주 선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장면이 지나치게 감동적으로 포장되지 않고 조심스러운 다짐처럼 처리된 덕분에, 저는 꽤 오래 여운이 남았습니다. 국내 1인 가구 비율이 2023년 기준 전체 가구의 35.5%에 달한다는 통계를 떠올리면(출처: 통계청), 결혼을 '제도'로서가 아니라 '선택'으로 다시 정의하려는 이 드라마의 시도가 왜 공감을 얻었는지도 이해가 됩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직시하는 작품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아쉽고, 그렇다고 달콤한 판타지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구체적인 삶의 조각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경계 어딘가에 있는 작품입니다. 결혼을 고민하고 있거나, 지금의 삶이 자기 것인지 의심이 드는 분이라면 한 번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이번 생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하나는 분명히 남겨줄 테니까요.


참고: 이번 생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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