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처음 틀었을 때는 기대가 꽤 컸습니다. 달 위의 왕국, 말 한마디가 도시를 날려버리는 왕, 머리카락으로 싸우는 왕비, 순간이동하는 거대한 개까지. 설정만 놓고 보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안에서도 손꼽히게 과감한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8부작을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재료는 최상급인데, 요리가 아쉽다.
설정만큼은 진짜였다 — 아틸란과 테리젠
일반적으로 MCU 드라마는 영화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휴먼즈》는 달 위에 숨겨진 왕국 '아틸란'을 전면에 세우며, 영화보다 더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야심 자체는 분명히 살아있었다는 점입니다.
인휴먼즈라는 종족의 탄생 배경부터가 그렇습니다. 외계 종족 크리(Kree)가 스크럴과의 전쟁을 위해 인간 유전자를 조작해 만든 존재들이라는 설정인데, 이 출발점 자체가 단순한 초능력 히어로물과는 결이 다릅니다. 여기서 핵심 장치가 테리젠 미스트(Terrigen Mist)입니다. 테리젠 미스트란 테리젠 크리스탈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기체로, 인휴먼이 이 안에 들어가면 개인마다 전혀 다른 초능력이 각성됩니다. 어떤 능력이 열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결과에 따라 사회적 계층과 역할이 결정됩니다.
이 구조가 드라마에서 제대로 작동했다면, 단순한 히어로 액션을 넘어 능력 기반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정면으로 건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이 이 계급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면 더욱 강력했을 텐데, 실제 화면에서 아틸란은 거대한 왕국답지 않게 몇 개의 복도와 홀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설정의 밀도와 화면의 밀도 사이 격차가 꽤 크게 느껴진 대목이었습니다.
연출이 설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드라마가 IMAX 상영까지 진행했다는 사실은, 제가 직접 보면서도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IMAX 포맷은 화면의 넓이와 해상도가 압도적이어서, 스케일 있는 장면을 극대화하는 데 쓰입니다. 그런데 실제 방송된 화면에서는 달의 왕국이 주는 웅장함보다 세트의 협소함이 먼저 눈에 들어올 때가 많았고, CG 역시 당시 기준으로도 아쉬운 수준이었습니다.
액션 연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블랙 볼트의 파괴적인 음성, 메두사의 강력한 머리카락, 크리스탈의 원소 조종 같은 능력들은 제대로 활용했다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전투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화면에서 이 능력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인상 깊게 폭발하는 장면은 드물었습니다. 격투와 폭발 중심의 일반적인 액션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아서, 나중에 "이 장면 때문에라도 봐야 해"라고 말할 수 있는 명장면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사건들이 연결되어 이야기를 이루는 방식도 문제였습니다. 서사 구조란 어떤 순서로 사건을 배치하고 감정을 쌓아가느냐를 결정하는 이야기의 뼈대입니다. 쿠데타 발생, 왕족의 지구 추방, 하와이에서의 재집결, 아틸란 귀환이라는 큰 뼈대는 분명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왕족이 하와이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중반부에서 각 캐릭터가 따로 에피소드를 소화하다 보니, 이야기 전체를 하나로 밀어붙이는 힘이 약해졌습니다. 긴장감이 쌓이다가도 금세 분산되는 느낌이 반복됐습니다.
드라마의 주요 구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2화: 아틸란 소개, 테리젠 각성 의식, 막시무스의 쿠데타 발발
- 3~5화: 왕족 각자의 하와이 생존기, 인간 사회와의 충돌
- 6~7화: 왕족 재집결, 아틸란 귀환 준비
- 8화: 막시무스 실각, 아틸란 에너지 고갈, 지구 이주 결정
구조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실행 단계에서 각 구간의 완성도 차이가 너무 크게 벌어졌습니다.
막시무스, 비극적 빌런이 되지 못한 이유
제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아쉽게 느낀 캐릭터가 막시무스(Maximus)입니다. "능력 없는 인휴먼 왕족"이라는 설정은, 초능력이 곧 신분인 사회에서 아무것도 각성하지 못한 왕의 동생이라는 설정 자체로 충분한 비극성을 품고 있습니다. 테리젠 의식에서 아무 능력도 얻지 못한 채 왕족 신분만 유지했다는 사실은, 이완 리온이라는 배우의 연기와 맞물렸을 때 분명 강한 인상을 남기는 순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막시무스를 계급 구조에 저항하는 정치적 인물로 깊이 파고드는 대신, 질투와 열등감에 갇힌 전형적인 형제 빌런으로 그려버리는 장면이 자주 반복됐습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이 사람의 분노가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연민이 생기다가도, 다음 장면에서는 단순한 폭군에 가까운 행동을 반복하는 식이었습니다. 일관된 인물상을 만드는 데 실패한 셈입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주인공이나 주요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개념을 기준으로 보면, 막시무스의 아크는 시작과 끝이 사실상 같습니다. 처음부터 왕좌를 원했고, 결말에도 왕좌를 놓지 못한 채 실각합니다. 중간에 그가 왜 이렇게 됐는지, 혹은 무언가를 깨닫고 달라지는 계기가 있었다면, 훨씬 기억에 남는 빌런이 됐을 겁니다.
아틸란의 계급 시스템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에 따라 직업과 계층이 결정되고,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문제의식이 몇 차례 언급되지만, 이를 왕족 스스로 반성하고 변화하려는 과정까지는 이어지지 못합니다. 결말에서 아틸란이 붕괴하고 지구로 이주하는 것이 그 대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왕국 자체가 사라진 것이 해결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능성은 남아 있다 — MCU 안에서의 위치
《인휴먼즈》가 시즌 2 없이 종료된 것은 저조한 시청률과 혹평이 직접적인 이유였습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 기준으로 비평가 점수가 10%대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얼마나 혹독한 평가를 받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출처: Rotten Tomatoes). 마블 텔레비전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낮은 완성도로 기록된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MCU 전체 맥락에서 완전히 버려진 아이디어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블 코믹스 원작에서 인휴먼즈는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설정과 서사를 갖추고 있는 종족입니다(출처: Marvel.com). 테리젠 미스트를 통한 능력 각성, 계급제 사회, 지구와의 공존 혹은 갈등이라는 틀은, 드라마판이 이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매력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블랙 볼트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 왕이라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정과 시선만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캐릭터는, 일반적인 마블 히어로들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연기를 요구합니다. 앤슨 마운트가 이 역할을 꽤 설득력 있게 소화했다는 평가는 드라마 전반에 대한 혹평 속에서도 종종 나오는 부분이고, 저도 직접 보면서 그 점만큼은 동의가 됐습니다.
결국 《인휴먼즈》는 세계관 설계 단계에서는 점수를 줄 수 있지만, 그것을 화면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예산·연출·각본의 삼박자가 맞지 않아 잠재력의 상당 부분을 날려버린 작품으로 남습니다. "이런 설정을 언젠가 다시, 제대로 된 예산과 연출로 보고 싶다"는 아쉬운 욕구가 남는다면, 그게 이 드라마의 가장 솔직한 유산일지도 모릅니다.
마블 드라마를 전부 챙겨보는 팬이라면 한 번쯤 보고 스스로 판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완성도 높은 히어로 드라마를 기대하고 들어간다면, 실망도 함께 따라올 가능성이 높다는 건 미리 알고 가시는 편이 낫습니다. 세계관 구경하러 들어갔다가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확인하고 나오는 경험, 저는 그것이 《인휴먼즈》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인휴먼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