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벌집 막내아들》 최종화 시청률은 26.9%를 기록했습니다. 역대 JTBC 드라마 최고 시청률이라는 수치를 보면서 저는 오히려 씁쓸한 기분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봤는데, 왜 결말 앞에서 이렇게 다들 허탈해했을까 싶어서요.
초반 5화가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이었다
저는 이 드라마를 처음 틀 때 큰 기대를 품지 않았습니다. 회귀물(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는 서사 장르)은 이미 국내 드라마 시장에서 수없이 반복된 포맷이고, 재벌 가족극 역시 막장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1화에서 주인공 윤현우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 그리고 눈을 떠보니 1987년 재벌가 막내 손자의 몸이라는 전개가 시작되는 순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속도감이 달랐습니다.
초반부가 특히 강했던 이유는 단순한 사이다 판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도준이라는 인물이 미래의 경제 이벤트를 활용하는 방식이 굉장히 구체적이었습니다. IMF 외환위기, 카드대란, IT버블 붕괴 같은 실제 경제사의 변곡점을 드라마적 상상력으로 비틀어 보여주는 방식이 몰입을 이끌었습니다. 여기서 오너리스크(Owner Risk)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기업의 최대주주나 경영진 개인의 행동이 기업 전체의 가치와 경영에 미치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윤현우는 그 오너리스크를 13년간 뒤처리해온 사람이었고, 이제는 반대로 그 구조 안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되려 한다는 설정이 드라마의 핵심 긴장감을 만들어 냈습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강하게 느꼈던 건, "이 작품은 계급 역전 판타지를 빌려 재벌 시스템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 같다"는 인상이었습니다. 흙수저 출신 비서가 아무리 충성해도 결국 버려지고 죽는다는 출발점은, 노력만으로는 뚫을 수 없는 구조적 불평등을 꽤 정확하게 건드리고 있었거든요.
진양철이라는 캐릭터가 만들어낸 서사의 무게감
이 드라마를 단순한 회귀 판타지로 만들지 않은 가장 큰 공로는 진양철 캐릭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르물에서 악역이나 대립 구도의 어른 캐릭터가 납작하게 그려지면 주인공의 승리가 싱거워지는데, 이성민이 연기한 진양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족보다 재벌 왕국을 먼저 지키려는 1세대 창업주의 논리가 나름의 일관성을 갖고 있었고, 그 안에서 진도준과 벌이는 수 싸움이 드라마 전반의 긴장감을 유지시켜 줬습니다.
승계 전쟁(Succession War), 즉 창업주 사후 경영권을 두고 일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은 이 드라마의 핵심 서사 축입니다. 승계 전쟁이란 단순히 "누가 회장 자리에 앉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분 구조·경영권 프리미엄·혼맥·비자금 등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전면전이라는 뜻입니다. 드라마는 진양철의 자식들과 손주들이 서로 물고 뜯는 과정을 통해, 실제 국내 재벌가에서 반복되어 온 분쟁 구조를 꽤 밀도 있게 재현했습니다.
국내 재벌 지배구조 문제와 관련해,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대규모 기업집단의 순환출자 구조와 일감 몰아주기 관행이 소수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비정상적으로 강화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드라마 속 순양그룹의 비리 구조가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말이 남긴 논란, 저는 이렇게 봤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혼수상태의 윤현우가 꾼 꿈이자 참회였다." 최종화의 이 내레이션은 방영 직후 시청자들 사이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15화 동안 감정을 쏟아부었던 진도준의 서사가 사실상 한 사람의 의식 속 경험으로 처리되는 순간, 많은 사람이 허탈함을 느꼈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정리하면 결말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 15화 분량의 진도준 서사가 윤현우의 꿈으로 처리되면서 시청자의 감정적 투자에 대한 보상이 사라졌습니다.
- 재벌 시스템에 대한 구조적 비판이 개인의 도덕적 참회로 축소되어, 작품이 내걸었던 사회 비판의 날이 무뎌졌습니다.
- 진도준으로서의 복수와 승리라는 판타지 완결 대신 "윤현우가 청문회에서 고백했다"는 현실 회귀형 엔딩이 선택되어, 장르적 기대치와 충돌했습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 보면, 이 결말은 명확히 정합성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쌓아가며 결론으로 수렴하는지를 가리킵니다. 초반 15화에서 드라마는 진도준의 미래 지식 활용과 승계 전략을 철저한 인과 구조로 쌓았는데, 마지막에 그 인과 전체를 "꿈"으로 무효화하는 건 시청자와의 서사적 계약을 어기는 선택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결말의 의도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복수도 꿈속에서나 가능하고, 현실은 양심의 고백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메시지는 나름의 무게를 갖습니다. 다만 그 메시지를 살리려면 시청자를 진도준의 판타지로 끌어들이는 시간이 그렇게 길어서는 안 됐습니다.
이 드라마가 진짜로 건드린 것
결말의 아쉬움을 걷어내고 나서도, 이 드라마가 남긴 것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헬조선, 이생망 정서를 단순히 감성으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 왜 이 구조가 반복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윤현우가 13년 동안 충성했음에도 결국 버려지는 장면은 "성실함만으로는 계급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한국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론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관객이 극 중 인물의 감정을 함께 경험하며 감정적 정화와 해소를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드라마의 초중반은 그 카타르시스를 계급 역전이라는 방식으로 제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청자들이 진도준에 열광한 건 단순히 재벌이 되는 판타지 때문만이 아니라, "이 구조를 뒤엎는 사람"을 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겁니다.
2022년 방송통신위원회 시청자 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내 시청자들의 드라마 시청 만족도에서 '사회 현실 반영'이 주요 요소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출처: 방송통신위원회). 《재벌집 막내아들》이 그 요구에 가장 크게 응답한 드라마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결말의 논란을 포함해 이 드라마를 어떻게 봐야 할지 헷갈린다면, 한 가지 기준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결말이 아니라 초반부 서사를 기준으로 이 작품을 평가해보는 것입니다. 판타지 완결 대신 참회 엔딩을 택한 선택이 비겁하다고 보는 시각도 이해하지만, 그 이전까지 이 드라마가 한국 재벌 구조의 민낯을 얼마나 흡입력 있게 펼쳐냈는지를 먼저 보면, 좀 더 공정한 평가가 될 것 같습니다. 드라마가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졌다는 것 자체는, 아직도 유효한 가치입니다.
참고: 재벌집 막내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