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드라마를 처음 틀었을 때 그냥 평범한 슈퍼히어로 오락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화가 끝날 즈음, "아, 이건 액션 드라마가 아니라 가족 드라마구나"라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주피터스 레거시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와 현재를 교차하며, 초능력을 가진 부모 세대와 그 유산을 짊어진 자녀 세대의 갈등을 정면으로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입니다.
세대갈등,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이렇게 다룬 작품이 있었나
제가 직접 8화를 다 보면서 느낀 건, 이 드라마가 슈퍼히어로 장르를 세대 간 이념 충돌의 그릇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유토피안(셸던 샘슨)과 아들 패러곤(브랜던 샘슨)의 충돌이지만, 실제로 드라마가 묻고 있는 질문은 훨씬 무겁습니다. "한 세대가 만들어낸 규칙이 다음 세대에게도 유효한가?"라는 거죠.
여기서 드라마의 핵심 장치가 바로 '코드(Code)'입니다. 코드란 1세대 히어로 집단인 더 유니언이 초능력을 얻은 직후부터 지켜온 불문율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며,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원칙을 말합니다. 이 코드는 셸던이 1929년 대공황 속에서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하고, 정신적으로 무너진 끝에 미지의 섬에서 초능력을 얻으면서 자신이 세운 신념의 결정체입니다. 즉 코드는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셸던이라는 인물의 트라우마와 생존 방식이 굳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코드가 수십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훨씬 폭력적이고 복잡해진 빌런들과 맞닥뜨린 2세대 히어로들에게는 사실상 족쇄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블랙스타라는 강력한 빌런이 등장해 동료들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브랜던은 결국 빌런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셸던은 아들에게 "너는 코드를 깼다"고만 말합니다. 이 장면이 답답하면서도 이상하게 납득이 됐습니다. 셸던이 왜 그 말밖에 못 하는지, 그 배경이 과거 타임라인에서 이미 충분히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장르론 측면에서 보면, 주피터스 레거시는 슈퍼히어로 장르 특유의 스펙터클(spectacle), 즉 시각적 충격과 쾌감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캐릭터 심리와 이념 갈등을 축으로 서사를 끌고 갑니다. 스펙터클이란 영화·드라마에서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대규모 시각적 연출을 뜻하는데, 이 부분에서 동시대 다른 히어로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절제된 편입니다. 이게 장점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쉬운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코드의 균열, 월터 반전이 의미하는 것
시즌 1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핵심 반전은, 모든 혼란의 배후가 스카이폭스(조지)가 아니라 셸던의 친형인 월터(브레인웨이브)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반전을 보면서 솔직히 꽤 오래 생각에 잠겼습니다. 단순한 "배신자가 있었다"는 구도가 아니라, 형제 사이에서 수십 년 동안 억눌려온 이념 충돌이 폭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월터는 텔레파시와 정신 조종 능력을 가진 브레인웨이브로, 드라마 내내 셸던의 코드에 조용히 반기를 들어온 인물입니다. 그가 믿는 건 이렇습니다. 초능력을 가진 존재가 세계의 혼란을 그냥 지켜보는 것 자체가 직무유기이며, 히어로가 정치와 권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히어로는 도구가 아니라 통치자여야 한다'는 논리로, 셸던의 이상주의와 정면충돌합니다.
블랙스타 복제 사건은 월터가 자신의 정신 조종 능력을 이용해 설계한 일종의 사회공학적 실험이었습니다.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이란 여기서는 기술이 아니라, 특정 심리적 트리거를 활용해 집단의 행동과 여론을 의도적으로 설계·조작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월터는 브랜던이 코드를 어기도록 상황을 만들고, 그 책임을 스카이폭스에게 돌려 셸던의 신뢰를 흔든 것입니다.
이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건, 단순히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월터의 음모는 "규칙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드라마의 중심 테마와 직결됩니다. 월터 역시 1세대 히어로입니다. 그도 섬에서 함께 초능력을 얻은 동료입니다. 그런데 그가 코드를 부수려 한다는 건, 1세대 내부에서도 이 규칙의 유효성에 대한 균열이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즌 1에서 제가 가장 주목한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셸던의 코드는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개인적 신념이지만, 집단 규범으로 작동하면서 다음 세대를 억압하는 구조가 됩니다.
- 브랜던의 코드 위반은 반항이 아니라 생존의 선택이었고, 세상은 그 선택을 지지했습니다.
- 월터의 음모는 이념 갈등이 가족 단위에서 조직 단위로 확장되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 블랙스타가 복제품이었다는 사실은, 이 모든 갈등이 처음부터 설계된 것임을 드러냅니다.
반전 이후 시즌 2 취소, 이게 가장 아쉬운 이유
제 경험상 이런 경우가 정말 허탈합니다. 8화 내내 조금씩 쌓아 올린 복선과 긴장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이제 본게임 시작이다"라는 신호를 보내자마자 시즌이 끝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시즌 2는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넷플릭스는 시청률과 시청 반응을 이유로 시즌 2를 취소했고, 세계관은 애니메이션 스핀오프 슈퍼크룩스로만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넷플릭스가 드라마 속편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완성률(completion rate)'이라는 지표를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성률이란 해당 시즌의 시작 에피소드를 시청한 사람 중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끝까지 본 시청자의 비율을 의미합니다. 완성률이 낮다는 건, 중간에 이탈한 시청자가 많다는 뜻이고, 이는 곧 시즌 속편 투자의 근거가 약해진다는 신호입니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완성률을 핵심 지표 중 하나로 활용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The Verge).
주피터스 레거시의 경우, 드라마 자체의 리듬감이 중반 이후 상당히 느려지는 구간이 있습니다. 이게 아마 완성률을 낮추는 데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슈퍼히어로 드라마에 기대하는 에너지와, 실제 드라마가 제공하는 심리극 중심의 전개 사이에서 이탈하는 시청자가 생겼을 거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원작 코믹스는 마크 밀러가 각본을, 프랭크 콰이틀리가 작화를 맡은 작품으로,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형식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래픽 노블이란 단편 만화가 아닌 장편 서사를 갖춘 성인 대상 코믹스 형식으로, 문학적 서사와 시각 예술이 결합된 매체입니다. 마크 밀러는 킥애스, 킹스맨 원작자로도 알려진 만큼 원작의 팬층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런데도 드라마화 과정에서 원작의 팬과 신규 시청자 모두를 붙잡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실제로 로튼 토마토 기준 평론가 점수는 60%대에 머물렀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정리하자면, 주피터스 레거시는 "슈퍼히어로 장르를 세대극과 이념 드라마로 확장하려는 야심이 뚜렷한 작품"이었지만, 장르적 완성도와 서사 리듬 면에서 그 야심을 끝까지 뒷받침하지 못한 채 멈춰버린 프로젝트입니다.
이 드라마가 지금도 아깝게 느껴지는 건, 월터의 반전 이후가 더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세대 내부의 균열, 2세대의 반격, 스카이폭스의 진짜 행방까지, 시즌 1은 그 모든 갈등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끝냈습니다. 슈퍼히어로 장르와 가족 드라마의 교차점에서 뭔가 새로운 걸 해보려 했던 시도 자체는 분명히 기억해둘 만한 작품입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액션보다 캐릭터와 이념 갈등에 관심 있는 분들께 단서를 달고 권해드립니다. "시즌 2가 없다는 걸 미리 알고 보세요."
참고: 주피터스 레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