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변에서 "우리 이혼했는데 오히려 더 잘 지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위로성 멘트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최고의 이혼」을 끝까지 보고 나서, 그 말이 꽤 진지하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KBS2에서 2018년 방영된 이 작품은 이혼을 관계의 파국이 아니라, 서로가 타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게 만드는 계기로 그립니다. 두 커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형태를 재설계하는 과정이 핵심인데, 보면 볼수록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관계 드라마에 가깝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혼이 드러낸 타인성, 그게 이 드라마의 출발점입니다
처음 몇 회는 솔직히 '이 커플 왜 결혼했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석무(차태현)는 집안일 하나하나를 자기 기준에 맞춰 설계하는 사람이고, 휘루(배두나)는 그 기준 자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매일 싸우고, 석무는 "결혼은 길고 긴 고문"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서 느낀 건, 그 싸움의 본질이 성격 차이가 아니라 '상대를 내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됐다는 점이었습니다.
여기서 드라마가 핵심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타인성(他人性)입니다. 타인성이란 배우자나 연인도 결국 나와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걸어온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사실, 즉 상대를 내 기준이나 기대로 동화시킬 수 없다는 인식을 의미합니다. 석무와 휘루는 결혼 제도 안에 있을 때 이 타인성을 자꾸 무시했고, 그 결과로 관계가 잠식되었습니다.
이혼과 별거를 거치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상대의 부재를 경험하고, 각자의 공간에서 혼자 서 보는 시간을 가진 뒤에야,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를 비로소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은 유영(이엘)과 장현(손석구) 커플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장현의 바람기와 책임감 부족은 유영에게 끊임없는 불안을 심어줬는데, 두 사람이 위기를 통과하면서 서로를 자신의 틀에 맞추려던 방식을 천천히 내려놓게 됩니다.
한겨레 리뷰에서도 지적했듯(출처: 한겨레), 이 드라마의 핵심은 "우리는 전부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길을 살아온 타인"이라는 진리를 이혼을 통해 실감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혼을 해피엔딩의 반대말로 쓰지 않고, 오히려 관계를 재설계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활용한 구조가 이 드라마를 단순 로맨틱 코미디와 구분 짓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 석무·휘루: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재단하다 관계가 틀어진 케이스
- 유영·장현: 자유분방한 연애가 결혼 제도 안에서 책임 부재로 이어진 케이스
- 두 커플 모두, 이혼·별거를 통해 타인성을 인정한 뒤 각자 다른 방향으로 관계를 재설계
제도 밖 사랑을 선택한 석무·휘루, 그 결말이 설득력 있었나요
석무·휘루의 결말은 꽤 독특합니다. 두 사람은 이혼 상태를 유지한 채 다시 연애를 시작하고, 혼인 신고를 할지 말지를 유보한 채로 "함께 늙어가자"는 선택을 합니다. 석무의 고백 대사가 인상적인데, "우리 계속 싸우고 화해하겠지, 매번 어리석음을 느끼겠지만 같이 있으면 즐겁지 않나"라는 식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게 현실적인가 낭만적인가' 사이에서 한참 고민했습니다.
이 선택을 드라마 용어로 설명하면 비제도적 동반 관계(non-institutional partnership)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제도적 동반 관계란 법적 혼인 신고라는 공식 제도 밖에서, 감정과 의지에 기반해 관계를 지속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서류 없이도 함께 사는 것"인데, 이것이 단순한 동거와 다른 점은 이혼이라는 경험을 통해 서로의 타인성을 충분히 인정한 뒤에 이루어진 선택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결말에 대해 "설득력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전자와 후자 사이 어딘가에 서 있습니다. 결혼 제도 안에서 서로를 맞추려다 실패했던 두 사람이, 그 압박을 걷어낸 뒤 다시 감정에 집중하는 구조 자체는 논리적으로 납득이 됩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 이혼 후 동거·비혼 동행을 선택하는 관계가 갖는 법적 공백이나 사회적 시선은 드라마가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메시지가 다소 낭만화되어 있다는 인상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 결말에서 긍정적으로 본 부분은 하나입니다. "혼인 신고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제도·역할 규범보다 관계 자체를 먼저 생각하겠다"는 태도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결혼을 사랑의 완성으로 등치시키는 통념에서 벗어난 선택으로, 이 드라마가 그것을 '더 진보적인 답'으로 제시하기보다 하나의 가능한 형태로 놓는 방식은 균형 잡혀 보였습니다.
결혼관의 대비 구조, 정답 없이 '적합성'을 묻다
유영·장현은 석무·휘루와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위기와 갈등을 지나, 결국 혼인 신고와 결혼식, 그리고 아이를 택합니다. 1년 뒤 딸을 키우며 하루를 보내는 장면이 마지막에 삽입되는데, 이 커플의 엔딩을 보면서 제가 느낀 건 "결혼이 해피엔딩의 공식"으로 쓰인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장현이 자신의 바람기와 무책임을 반성하고, 유영이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흐름은 책임성 재구성(responsibility reconstruction)의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책임성 재구성이란 관계 안에서 각자가 맡아야 할 역할과 의무를 위기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정립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 커플에게 결혼 제도는 단순히 "법적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역할을 새로 쓰겠다는 선언으로 기능합니다.
이 두 커플의 결말을 나란히 놓고 보면, 드라마가 의도한 대비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석무·휘루는 제도 안에서 서로를 맞추려다 실패한 뒤 제도 밖을 택했고, 유영·장현은 자유로운 연애 방식이 결혼 안에서 책임 부재로 이어진 뒤 제도 안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어느 쪽이 더 옳다는 메시지는 없습니다. 저는 이 구조를 보면서, 드라마가 결혼관(結婚觀)에 대한 특정 답을 제시하기보다 "각자에게 맞는 관계 형식이 다를 수 있다"는 적합성의 논리를 택했다고 느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대비 구조가 한국적 현실과 충분히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혼 후 비혼 동행이 실제로 갖는 법적·사회적 공백, 또는 유영·장현처럼 결혼 제도를 다시 선택했을 때 한국 가족 구조 안에서 맞닥뜨리는 현실(시월드, 육아 분담 문제 등)까지는 거의 파고들지 않습니다. 이 지점은 일본 원작의 구조를 한국 정서로 충분히 현지화하지 못했다는 평가와도 연결되는데, 저도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들의 감정이 깊어졌다기보다 갈등 장면을 위해 소모되는 듯한 인상을 받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결혼 없는 사랑이 더 진보적이다"도, "결혼 안 사랑이 더 안전하다"도 말하지 않고, 두 가지를 동등하게 놓는 균형감을 유지한 것은 분명 이 작품의 미덕이라고 봅니다. KBS 종영 보도 자료에서도 확인되듯(출처: KBS), 드라마의 메시지는 "결혼·이혼이 행복의 정답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관계 형태를 찾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도 이 방향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최고의 이혼 결말이 해피엔딩인가요?
A. 두 커플 모두 나름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석무·휘루는 이혼 상태를 유지하면서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열린 해피엔딩'을, 유영·장현은 혼인 신고와 아이를 통해 가정을 꾸리는 전통적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한 결말인지는 보는 사람의 결혼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고 봅니다.
Q. 한국판과 일본 원작, 어떻게 다른가요?
A. 일본 원작(2013)은 사카모토 유지 각본의 10부작으로, 속으로 눌러두다 한 번에 터뜨리는 정서와 촘촘한 감정선이 특징입니다. 한국판은 32회 분량으로 늘어나면서 중반 이후 자극적 갈등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겼다는 평이 있습니다. 원작의 정서를 한국 현실로 완전히 현지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는 반면, 차태현·배두나 특유의 코미디 호흡이 오히려 접근성을 높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Q. 이혼 후 동거를 선택한 석무·휘루의 결말이 현실적인가요?
A. 감정의 흐름 자체는 설득력이 있지만, 이혼 후 비혼 동행이 갖는 법적 공백이나 사회적 시선 같은 현실적 맥락은 드라마가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메시지가 다소 낭만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다만 결혼과 사랑을 동일시하지 않는 시각을 하나의 가능한 선택으로 보여줬다는 점은 분명 의미 있는 시도라고 봅니다.
Q. 손석구가 나오는 드라마인가요?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요?
A. 맞습니다. 손석구가 이장현 역으로 출연합니다. 두 커플이 서로의 거울이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유영·장현 라인도 비중이 상당합니다. 바람기 많고 책임감 부족한 인물로 시작해 점차 변하려 애쓰는 캐릭터인데, 지금의 손석구 필모그래피와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결론
「최고의 이혼」을 다 보고 나서 가장 크게 남은 문장은 석무의 고백 대사입니다. "싸우고 화해하겠지, 어리석음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즐겁지 않나." 완벽한 부부가 아닌, 불완전한 동행을 받아들이는 이 고백이 결혼이라는 제도보다 더 정직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결혼관·가족관이 빠르게 다양해지는 지금,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일본 원작의 정서를 한국 현실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음에도, "결혼 없는 사랑과 제도 안 사랑을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태도는 분명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두 커플의 결말을 비교하며 보시는 걸 권합니다. 내 주변의 관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참고: 최고의 이혼 — KBS